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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1961 쿠바 백서 통상확대법 파나마 분쟁 태평양 선언 산호세 핑퐁외교 탈냉전

by 그대 곁에 머물다 갑니다 2024.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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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쿠바 백서
2. 평화봉사단
3. 통상확대법
4. 파나마 분쟁
5. 태평양 국가선언
6. 산호세 선언
7. 닉슨 독트린
8. 상해 코뮈니케
9. 카신저 외교의 종언
10. 카터의 외교정책
11. 탈냉전 시대의 미국외교


1. 쿠바 백서

 1961년 4월 3일 미국 정부가 발표한 쿠바정책에 관한 소책자이다. 케네디 대통령 고문인 아서 슐레징거 교수가 집필했다. 이 백서는 카스트로 혁명이 공산주의 세력의 손에 놀아나고 소련의 세계 정책을 무조건 받아들여 소련제 무기를 대량도입하는 등 쿠바 무역량의 75%가 공산권에 의존하고 있어 쿠바는 사실상 소련의 위성국으로 되었고 중남미대륙의 혁명활동 근거지로 변하였다고 논하였다.


2. 평화봉사단

 1961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의 구상에 의하여 발족하였다. 미국의 청년들에게 각종 기술을 배우도록 하여 그들을 2년 기한으로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으로 파견함으로써 개발도상국의 생활수준 향상에 기여토록 한 것을 말한다. 평화군단이라고도 한다.


3. 통상확대법

 1934년에 만든 호혜통상협정을 개정하여 1962년 10월에 공포한 새로운 입법을 말한다. 그 내용은
① 대통령은 5개월 동안 관세를 50% 인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② 미국, EEC제국, 영국, 덴마크, 노르웨이, 아일랜드, 그리스의 수출합계가 자유세계 수출량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상품에 대해서는 100%까지의 관세인하(결국 관세를 제로까지 내린다)를 시킬 수 있는 권한을 인정받는다는 것 등이다.


4. 파나마 분쟁

 1964년 1월 9일 미국이 관리하는 파나마운하 지대 내의 한 고등학교에서 미국인 학생이 파나마 국기를 게양하지 않았다고 항의하면서 난입한 파나마인 학생들에 대하여 미국의 경찰관 및 군대가 발포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파나마 정부는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유엔의 안전보장이사회가 중재에 나섰지만 파나마 정부는 운하 사용료의 증액을 포함해서 1903년의 미국과 파나마조약의 근본적 개정을 요구하였다. 미국이 영구 사용권과 사법, 행정권을 행사해 온 파나마운하 지대에서는 1960년대ㅐ 이후 계속 민족주의적인 반미운동이 격화되어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었다. 미국과 파나마는 해결을 위해 1977년 8월 새 파나마운하 조약을 체결하였다.


5. 태평양 국가선언

 1966년 7월 12일 존슨 대통령이 전미국대학 졸업자협의회에서 행한 연설 속에서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관한 기본방침을 밝힌 바 있는데 태평양국가로서 미국은 태평양시대의 도래에 기대를 걸고 아시아에 있어서의 미국의 책임을 과감하게 실천하겠다는 결의를 명백히 하였다. 미국이 아시아정책을 이만큼 중요시한다고 선언한 것은 이것이 최초의 일이다.

태평양 국가선언


6. 산호세 선언

 1960년 8월 코스타리카의 산호세에서 열린 미주회의의 외상회의에서 발표된 결의를 말한다. 즉 미주지역의 어느 국가라도 미주대륙 이외의 국가로부터 간섭이나 위협을 받을 수 없다는 선언이며 이것은 쿠바 혁명정부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원조를 비난한 것이다. 쿠바의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은 9월 2일 아바나의 백만인대회에서 이에 대항하여 아바나선언을 발표하면서 미국을 비난하고 중국을 승인할 방침을 밝힌 바 있다.


7. 닉슨 독트린

 1969년 7월 26일 닉슨대통령이 괌섬에서 밝힌 미국의 아시아 여러 나라 당사자들 자신이 저항, 저지해야 된다는 입장을 선언한 이 원칙은 미국의 재래식 아시아 방위 개념을 전폭 수정한 것으로 1980년대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8. 상해 코뮈니케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고 귀국할 때 상해에서 발표한 미,중국 공동선언, 중국 정권 수립 후 적대관계를 계속해 오던 미국은 1971년의 '핑퐁외교' 이후 이듬해의 닉슨 중국 방문, 1973년의 워싱턴, 북경 연락 사무소 개설 등의 급격한 변화를 꾀해 나갔다. 8억 인을 제외시킨 세계평화는 이룩될 수 없다는 닉슨의 폭탄선언 이후 미국은 중국이 하나이며 대만은 중국의 일개 성이라는 중국측의 주장까지 수긍하고 세게 및 동북아 지역의 평화전략을 수정한 것이 상해 코뮈니케의 기본 정신이다.


9. 카신저 외교의 종언

 닉슨 대통령때 안보담당 특별보좌관 및 국무장관으로 있으면서 키신저가 전개해온 외교방식은 비밀주의와 대국 위주 정책이었다. 파리 협상, 중국 방문, 중동전, 파나마 분쟁 등 그가 관여한 모든 외교정책이 미국내에서 크게 비판받아 카터의 등장 이후 결국은 사라지고 말았다.


10. 카터의 외교정책

 1976년 11월 제38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카터는 중도 보수주의의 정치이념으로 국내 문제에서는 예산삭감, 인플레억제, 낭비일소를 내걸고 대외정책으로는 종전의 힘의 외교를 버리고 도덕성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카터 대통령이 내세웠던 도덕성은 인권 문제와 직결된 문제로서 많은 지지와 함께 일부 사회주의 국가 및 후진국으로부터 내정간섭이라는 비난도 없지 않았다. 특히 한국과는 주한미군 문제로 많은 과제를 안고 있었다.


11. 탈냉전 시대의 미국외교

 1991년 말 소련의 독립국가 연합으로의 재편과 러시아의 출발이라는 시점과 거의 동일하게 출범한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외교 정책은 그 목표로 4가지 사항을 제시하고 있다. 세부 사항은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한 지역 위협 규제와 대량살상무기 확산금지, 미국의 경제력 회복, 그리고 민주주의의 확산으로 규정되고 있다. 우선, 지역 위협 규제는 이라크, 이란, 리비아, 그리고 북한 등 반미 이데올로기를 주창하는 국가를 제압하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국가들은 대부분 대량 살상 무기 확산 금지 대상으로도 지목되고 있다. 미국이 자국의 패권을 위하여 이렇게 지역 위협규제와 대량 살상 무기 확산의 금지를 자국 목표의 두 가지 사항으로 지정한 이유는, 탈냉전 시대의 러시아는 이미 미국의 적이 아니며, 중국 역시 일정 수준 미국에 협력하고 있다는 안보 환경 평가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현재와 같이 강대국간의 협력이 큰 문제 없이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이라크나 북한과 같이 잔존하는 공산주의 또는 반미주의를 제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목표는 1994년 말 현재 상당한 수준에서 성공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이라크는 걸프전에서의 타격 이후로 거의 재기가 어려운 상태이며, 이란이나 리비아 역시 미국의 감시하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탈냉전 시대의 개막 이래로 미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북한의 핵문제가지도 일단은 타결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탈냉전

 사실상, 북한 핵문제는 미국으로서는 매우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인정되는 미국도 북한의 벼랑 외교와 평화 공존 5원칙을 주장하는 중국의 반대로 제재보다는 유인 요인 제공이라는 대화를 택해야 했으며, 국제적 자존심과 한국을 동원한 수십억 달러의 비용 지불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값비싼 대가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성공으로 치부할 수 있는 외교적 선택으로 간주되고 있다.

 미국의 또 다른 대외 정책의 목표인 경제력 회복은 현재 4조 달러를 상회하는 재정 적자와 크게 줄지 않는 국제무역수지 적자를 줄이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띤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회복 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되는데, 그 하나는 국내 경제의 정상화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국제 경제 전략으로서 무역 적자 축소를 포함하는 국제 통상의 증대이다. 국내 경제의 정상화가 국방비 감축을 포함하는 지출 삭감, 조세 인상, 그리고 3,000억 달러 규모의 단기 정부 투자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국제 경제는 일본과의 경제 불균형 시정과 함께 한국 및 서구와의 경제관계 재정립의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 역시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우선 정부 재정 적자가 감소되는 추세에 있으며, 비록 미,일간의 무역협상이 지연되는 경향이 있으나 미국의 수출은 일반적으로 증대되고 있다. 더 나아가 NAFTA의 창설로 인한 미국, 캐나다, 멕시코 3국의 자유 경제 교류는 경제 기반이 강한 미국에 더욱 유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며, 특히 WTO의 도입은 과거 GATT시대보다 훨씬 자유화되고 미국에 유리한 세계 경제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이렇게 경제 회복을 추구하는 이유는 경제 그 자체의 부흥을 통하여 자국민의 생활 수준을 증진시킨다는 목적도 있으나, 국제 정치의 측면에서는 그것이 외교 활동의 자금원인 동시에 군사력 증가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미국은 현재와 같은 평화시에 국내외적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하여 경제를 강화시키고 일단 유사시에 대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민주주의 확산 의지는 자국의 이데올로기의 확산 시도를 의미한다. 미국이 그러한 열망을 갖고 있는 이유는 당연하다. 그것은 비슷한 정치 체제를 보유함으로써 체제간의 교류가 가능하고 불필요한 갈등의 소지가 줄어들며, 자국정치 체제의 수출이라는 심리적 이익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민주 체제는 시장경제를 동반하며, 타국가의 시장경제 채택은 미국 시장의 확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경제 회복 의지와 민주주의 확산 희망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정책 역시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비록 중국의 위상과 입장을 감안하여 인권 문제를 크게 문제시하고 있지는 않으나 적어도 그러한 기본 입장은 확실하게 전달하고 있으며, 세계의 수많은 국가들이 권위주의 정권에서 민주주의 정권으로 전항하고 있다. 베트남 같은 국가와도 관계 개선과 경제지원을 통하여 민주사상 유입을 시도하고 있으며, 아이티의 군사 정권도 민주 정권으로 전환되었다. 미국의 이러한 외교 정책과 성공적 수행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초는 미국의 국방 정책, 군사력, 그리고 군사 전략이다. 우선, 미국 국방 정책의 추진방향은 세계 모든 국가들과의 협력과 견제를 위한 협력적 개입이라고 불리며, 그 요소로 간주되는 것은 미국의 군사력, 군사 동맹, 전진 배치, 그리고 다자 안보협력 등이다. 보다 명확히 말하면, 미국은 자국의 군사력을 토대로 한 협의 투사와 전진 배치 등을 통하여 전세계의 문제에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라도 개입한다는 것이다.

아파치

 비슷하게 미국은 군사 전략에 있어서 동시 전장 승리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 거의 동시에 전쟁이 발생할 경우에 대비한 전략으로, 그에 필요한 전력 수준은 병력의 경우 1999년까지 170만 명에서 140만 명으로 감축되게 되어 있다. 세부적으로 육군은 현역 14개 사단에서 10개 사단으로 간주되고, 해군 함모전단은 14개에서 12개로 감축되게 되어 있다. 해병대는 현역 17만을 유지하며, 전략은 ICBM 500기, SLBM 18척, 전략폭격기 184대 유지, 유럽 및 극동 주둔 미군은 각 10만 병력 유지, 아.태 지역 주둔 미군의 병력은 35만 명을 유지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다.

 동시 전장 승리 전략의 작전 단계는 4단계로 구분되는데, 그것은 세부적으로 침략의 저지, 적 전투 능력을 감소시키는 가운데 미국 전투력 증강, 적 패퇴, 그리고 전후 안정 제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단계적 전투를 지원하는 사항으로 사전 배치, 공중 수송, 해상 수송, 전장 감시 탄약 및 공중 급유 등이 중요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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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이 모든 국방, 군사 전략을 뒷받침하는 국방 예산은 1993년에 2,730억 달러, 1994년에 2,634억 달러, 그리고 1997년에 이르러 2,460억 달러로 감축했다. 이 기간 중의 실질 감소율은 평균 5.3퍼센트로 미국의 국방비가 국내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986년의 6.3퍼센트에서 1994년에 4.1퍼센트로, 1997년에 3.0퍼센트 수준으로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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