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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케네디 상원의원 암살사건 비미활동위원회 매카시즘 산군복합체 흑인문제 NAAP

by 그대 곁에 머물다 갑니다 2024.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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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케네디 상원의원 암살사건
2. 비미활동위원회
3. 매카시즘
4. 로젠버그 사건
5. 산군복합체
6. 흑인문제


1. 케네디 상원의원 암살사건

 R.F. Kennedy 1968년 대통령 선거운동의 도중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승리를 선언한 후 로버트 케네디 민주당 상원의원(케네디 전 대통령의 동생)이 사한이라는 인물에게 암살된 사건이다. 케네디 의원의 죽음은 대통령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존슨 대통령은 6월 5일에 성명을 발표하고 케네디 의원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 원인은 '병든 아메리카' 때문이라는 견해를 배격하고 이 사건은 한 광인의 짓이라고 하여 조사위원회의 설치와 총포소지규제의 강화 등 조치를 취하였다.

케네디
케네디

2. 비미활동위원회

 1938년 미국의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비미국적, 파괴적 활동을 조사하고 탄핵하기 위하여 하원에 처음 특별위원회로서 설치한 것으로 1943년 이후에는 상임위원회로 되었다. 제2차 대전 후에는 특히 공산주의자의 적발에 중점을 두었다.

 

 

3. 매카시즘

 공화당의 상원의원 J.R. 매카시가 1950년 2월 국무부 내에 침투한 공산당원 200명의 추방을 요구함으로써 처음으로 전개한 히스테릭한 반공주의 운동을 가리킨다.

 1954년 4월 그는 육군군부 내에도 공산당원이 있다고 공공연히 비난한 바 있으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여 상원 국내 치안분과위원장의 직책을 상실하였다.

매카시즘

 그 뒤에 이른바 매카시즘 선풍은 급속히 퇴조하기 시작했으며 1957년 6월 17일에는 연방최고법원이 미국 시민의 인권과 자유를 고수하는 네 가지의 중요한 판결을 내린 바 있다.

4. 로젠버그 사건

 1950년 7월 전기기사였던 로젠버그 부부가 로스 앨러모스 원자력공장에 근무하고 있는 부인의 친동생인 그린 글래스 군인을 사주하여 원자력의 최고 기밀을 춤쳐내어 구소련으로 넘겨 주었다고 하여 체포된 원자력 스파이 사건이다. 징역 17년을 복역한 그린 글래스의 자백 이외에는 아무런 물적 증거도 없었기 때문에 의문점이 허다하였다.

5. 산군복합체

 제2차 대전이 끝난 뒤에 냉전체제 속에서 미국이 방대한 군비와 군수산업을 계속하여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국부와 군수산업의 강력한 결합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크게 위협할 정도로 거대한 세력을 확보하게 된 것을 말한다. 이 산군 복합체라는 용어는 1961년 1월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고별연설에서 비롯된다. 군부 및 군수자본과 의원의 대정부활동을 군수품 로비라고 부른다.

6. 흑인문제

 미국 총인구 2억 4천만 명 가운데 2천 5백만 명이 흑인이다. 이것은 전체 인구의 약 11%에 해당한다. 흑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백인들로부터 차별을 받고 있다. 원래 흑인들은 노예로서 미국에 온 사람들의 자손들로서 그들 대부분은 미국 남부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많은 흑인들이 미국의 북부 및 태평양 연안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그곳에 지역적으로 '흑인 밀집지대'가 탄생하였다. 1900년에만 해도 흑인인구의 90%가 남부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1960년에 이르러선 남부에 거주하는 자는 60%로 낮아졌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노동력의 부족을 흑인들로 메꾼 결과, 일부 흑인들은 경제적 지위의 향상을 얻었지만 아직까지도 남부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 전체의 흑인들은 법률적, 경제적, 사회관습면 등에서 많은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흑인의 실업률은 항상 백인들의 2배를 넘고 흑인 노동자는 "맨 먼저 해고당하고 맨 마지막으로 고용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대부분의 주에서는 흑인은 백인과의 결혼이 법률로써 금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가지도 흑,백문리가 행하여지고 있다.

NAACP

 흑인의 해방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왕성해졌다. 최초의 대운동은 마커스 기베가 부르짖은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이때부터 진보적인 백인과 흑인이 모여 1909년에는 전국 유색인종 향상협회 즉 NAAP를 창립하고 흑인의 차별철폐 운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1954년에 연방최고재판소에서 내린 흑인분리교육 위헌 판결은 흑인의 권리옹호 투쟁에 있어서 중대한 승리였다. 처음에는 소수의 북부 흑인단체나 몇몇 진보적인 백인이 한정된 투쟁을 벌였던 것이 그 이후부터는 남부 흑인 대중에 의한 투쟁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1957년의 리틀 록 고등학교 사건과 1963년의 버밍햄대학사건 등 차별교육 반대투쟁은 때때로 흑인대중과 남부 차별주의자와의 사이에 무력형태의 투쟁으로 번졌다. 1963년 8월에는 워싱턴에서 '직업과 자유를 위한 행진'이 행하여졌다. 그러나 1964년 8월에 있었던 뉴욕의 할렘폭동 이래 해마다 '길고 무더운 여름(케네디 대통령의 말)'이 되풀이될 때마다 수많은 도시의 슬럼가에서 흑인폭동 사건이 발생했다. 1967년 여름에는 디트로이트, 시카고를 비롯하여 미국의 각 지역에 광범하게 폭동이 파급되었다. 1950년대로부터 1963년 전반기에 이르는 동안에 흑인차별법이 차차 찰폐되고 1964년네는 공민권법이 성립되었지만 오히려 흑인폭동은 한층 광폭화, 과격화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실정이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으나, 가령 법률상의 차별이 철폐된다 하더라도 주거, 직업, 군대 등에서 사실상의 차별은 뿌리 깊게 남아 있어서 흑인들의 불만을 쉽게 해소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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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인운동 단체

 흑인들의 지위 향상을 위한 단체는 미국에 수없이 많다. 중요한 것을 든다면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온건파 단체로 유색인종 지위향상협회(NAACP), 전국 도시연맹(NUL),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끌던 중간파로서 남부 기독교 지도자회의(SCLC), 그외 좌파로서 인종평등회의(CORE),, 학생 비폭력조정위원회(SNCC), 말콤X의 흑인회교단 등이 있다. 1966년경부터 흑인운동의 주도권은 블랙 파워를 외치는 SNCC를 중심으로 한 급진파에게 옮겨져 갔다. 그러나 백인들과의 협력을 일체 거부하는 급진파들의 태도에 대하여 NAACP 등 온건파들은 이를 반대함으로써 흑인 운동 지도자간의 분열은 한층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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