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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동궐도 인정전 후원 태종 선종 헌종 고종 숙종 궁궐

by 그대 곁에 머물다 갑니다 2023.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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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동궐도 인정전 후원 태종 선종 헌종 고종 숙종 궁궐

◎창덕궁 소개
 창덕궁은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의 궁궐이다.
 1405년(태종5) 경복궁의 이궁으로 동쪽에 지어진 창덕궁은 이웃한 창경궁과 서로 다른 별개의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하나의 궁역을 이루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이 두 궁궐을 형제궁궐이라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어 광해군 때에 재건된 창덕궁은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창덕궁은 응봉자락의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 더불어 비원으로 잘 알려진 후원은 각 권역마다 정자, 연못, 괴석이 어우러진 왕실의 후원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따는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궁궐 건축 그림이다. 비단 바탕에 채색한 가로 576cm 세로 273cm 이며 순조 30년에 불타버린 환경전과 순조 34년에 중건된 통명전 경복전 건물은 없고 터만 그려져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제작 연대는 1826년~1828년 경으로 추정된다.
 열여섯 폭의 비단에 먹과 채색 물감으로 당시 궁 안에 실재했던 누정, 다리, 담장은 물론 연못, 괴석 등의 조경과 궁궐외곽의 경관까지 세밀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당시 화원들의 뛰어난 화공기법과 정밀성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동궐도는 예술적 가치와 더불어 연구와 복원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궁궐전각 소개

▶돈화문 : 교화를 돈독하게 한다.
 규모와 품위를 함께 갖춘, 창덕궁의 정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1609년에 재건되었다.

▶궐내각사 : 궁궐 내의 중앙 관서
 왕과 왕실을 보좌하는 궐내 관청
관청은 대부분 궐 바깥에 있었지만,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안에 세운 관청들을 궐내각사라고 불렀다. 인정전 서쪽 지역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 약방, 옥당(홍문관), 예문관이, 서편에 내각(규장각), 봉모당, 대유재, 소유재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근위 관청이며, 여러 부서가 밀집되어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규장각, 대유재, 소유재는 단순한 도서관으로 기능이 변했다가, 그나마도 소장 도서들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기면서 규장각과 봉모당 등 모든 궁궐전각들이 헐리고 도로와 잔디밭으로 변해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2000~2004년에 걸쳐 복원되었다.



▶금천교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 위에 설치되어 있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죽대를 설치하였고, 여기에 금천교를 설치하여 궐내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금천교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태종 11년(1411) 3월 진선문 밖 어구에 설치되었는데, 그 후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규모는 의장을 갖춘 국왕의 행차 때 노부의 폭에 맞도록 설정되었으며, 상면은 길이 12.9m, 너비 12.5m로 정사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폭이 넓다.
 구조는 하천 바닥의 중앙과 물가에 놓인 기반석을 토대로 홍예를 2개 튼 형식으로 물가의 죽대는 부벽구실을 하고 있으며, 홍예 위에는 장대석 모양의 멍에돌을 얹었다. 다리의 상면은 불룩하게 곡면으로 만들고 바닥을 3칸으로 구분하여 칸마다 장대석을 고르게 갈았으며, 다리 가장자리에는 그 위에 동물상을 조각한 이주석이 세워져 있다.
 난간은 머리 부분을 연화보주형으로 장식한 법수와 그 사이에 세운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판석은 하엽동자기둥 모양의 부조를 중심으로 2칸으로 분절되었고 칸마다 안상을 투각하여 놓았다.
 법수 밑에는 멍엣돌 위치에서 돌출된 석재에 짐승머리모양을 환조로 조각하였다. 다리 측면의 홍예 사이 벽에는 귀면형이 부조되어 있고, 그 아래쪽의 홍예 기반석 위에는 남쪽에 해태상, 북쪽에 거북이상 등 환조로 만든 동물상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금천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며, 궁궐의 위엄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각상과 아름다운 문양, 견고하고 장중한 축조 기술 등이 돋보이는 이중 홍예교로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다.

▶인정전
 인정문과 인정전 : 어진 정치

- 인정문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효종, 현종, 숙종, 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ㅇ ㅟ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형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천장은 천장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단청은 가장 소박하게 꾸몄다.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 인정전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던 곳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궁궐전각으로 세워져 당당해 보이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아 경복궁의 긍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을 볼 수 있다.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다. 전등, 커튼, 유리 창문 등과 함께 1908년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인정문 밖 외행각에는 호위청과 상서원 등 여러 관청들을 두었다.
 1405년(태종 5)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418년(태종 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 2)에 재외행각 일원은 1991년 이후에 복원했다.

- 인정전의 내부
 인정전 안에는 정면에 임금님의 용사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과 곡병 뒤에는 일월오약도라는 병풍이 있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다시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그 아래 다섯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 서, 남, 북, 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이는 국토를 의미한다.
 이것은 임금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주변에는 유리창을 비롯하여 전구나 커튼 등 서양 장신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 온 것이며,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 인정전의 실내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구가 설치되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참고로 5대궁 중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곳은 1887년 경복궁이다.

▶선정전
 임금의 집무실로 쓰인 곳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세미나 격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1461년(세조 7)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을 비서실, 부속실로 이용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뒤편의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 가면서 순조 이후에는 이곳을 혼전(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희정당 : 화락한 정치
 침전에서 편전으로 바뀌어 사용된 곳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궁궐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 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에 복구하면서 경복궁에 있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동궐도>에 그려진 원래의 희정당은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세운 아담한 집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이 모습과 완전히 다르고, 원래의 강녕전과도 다르다. 재건된 희정당 내부는 쪽마루와 카펫, 유리 창문, 천장에 상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대조전 : 큰 공업을 이룬다
 비극적 역사가 담겨 있는 침전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흥복헌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1917년 불타 없어진 터에 1920년에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어 현재의 대조전이 되었다. 이건하면서 창덕궁의 상황에 맞추어 재구성했는데,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했다. 원래 궁궐의 복합적인 구성을 잘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부분이다.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하였으며, 왕실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낙선재 : 선을 즐긴다.
 헌종의 검소한 면모가 느껴지는 곳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으로 맞이하여 1847년(헌종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 등을 지어 수강재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 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


◎후원소개


▶후원입구 _ 성정각 일원에서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담을 따라 올라가면 왕실정원의 초입부인 부용지에 이른다.

▶부용지 : 연꽃
 휴식과 학문적 용도로 쓰인 아름다운 건물들, 이곳은 후원의 첫 번째 중심 정원으로, 휴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300평 넓이의 사각형 연못인 부용지를 중심으로 여러 건물을 지었다. 주합루 일원의 규장각과 서향각 등은 왕실 도서관 용도로 쓰였고, 영화당에서는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영화당은 동쪽으로 춘당대 마당을, 서쪽으로 부용지를 마주하며 앞뒤에 됫마루를 둔 특이한 건물이다.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의 부용정은 연못에 피어있는 한송이 꽃의 형상을 하고 있다. 행사가 치러지던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다.
 하나하나의 건물도 각각 특색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풍경이 되는 절묘한 경관이다. 현재는 어수문을 중심으로 생울타리인 취병을 재현하여 지역을 구분하고 있다.

▶불로문, 애련지 : 늙지 않는다, 연꽃을 사랑한다.
 군자의 성품을 닮은 경치, 1692년(숙종 18)에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성은 없고 정자는 연못 북쪽 끝에 걸쳐 있다. 연꽃을 특히 좋아했던 숙종이 이 정자에 '애련'이라는 이름을 붙여, 연못은 애련지가 되었다. 숙종은 '내 연꼿ㅊ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새정자의 이름을 지은 까닭을 밝혀 놓았다. 애련지 서쪽 연경당 사이에 또 하나의 연못이 있는데, 원래 이곳에 어수당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1827년(순조 27) 효명세자는 애련지 남쪽에 의두합을 비롯한 몇 개의 건물을 짓고 담장을 쌓았다. 현재 '기오헌'이라는 현판이 붙은 의두합은 8칸의 단출한 서재로, 단청도 없는 매우 소박한 건물이다. 바로 옆의 운경거로 추정되는 건물은 궐 안에서 가장 작은 한 칸 반짜리 건물이다.

▶존덕정과 폄우사 : 어리석은 자에게 돌침을 놓아 깨우쳐 경계한다 는 뜻으로, 스스로를 권면하는 말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 이 일대는 후원 가운데 가장 늦게 갖춰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모습은 네모나거나 둥근 3개의 작은 연못들이 있었는데, 1900년대 이후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관람지라고 부른다. 연못을 중심으로 겹지붕의 육각형 정자인 존덕정, 부채꼴 형태의 관람정, 서쪽 언덕 위에 위치한 길쭉한 맞배지붕의 폄우사, 관람정 맞은편의 승재정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을 세웠다. 폄우사는 원래 부속채가 딸린 'ㄱ'자 모양이었으나 지금은 부속채가 없어져 단출한 모습이고, 숲 속에 자리잡은 승재정은 사모지붕의 날렵한 모습이다. 1644년(인조 22)에 세워진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관람정과 승재정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옥류천 : 옥같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
 다양한 각도에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 옥류천은 후원 북쪽 가장 깊은 골짜기에 흐른다. 1636년(인조 14)에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내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곡선형의 수로를 따라서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을 벌이기도 했다. 바위에 새겨진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어언절구 시는 이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다. 소요정, 태극정, 농산정, 취한정, 청의정 등 작은 규모의 정자를 곳곳에 세워, 어느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는 정원을 이루었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은 볏집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이다. <동궐도>에는 16채의 초가가 보이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청의정만 궁궐 안의 유일한 초가로 남아있다.

▶연경당과 선향재 : 경사가 널리 퍼진다, 좋은 향기가 서린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뜬 조선 후기 접견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를 울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1828년(순조 28)경에 창건했다.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년쯤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사랑채와 안채를 분리되어 있지만 내부는 연결되어있는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일반 민가가 99칸으로 규모가 제한된 데 비해, 연경당은 120여 칸이어서 차이가 난다. 서재인 선향재는 청나라풍 벽돌을 사용하였고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후원 높은 곳에 있는 농수정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한채 뒤편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반빗간이 있다. 고종 이후 연경당은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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