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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문화 미니 특강 염거화상탑과 탑지 청동검 평창 돌널무덤 춘천 중도 토기

by 그대 곁에 머물다 갑니다 2024.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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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염거화상탑과 탑지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naver.com)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승탑.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terms.naver.com

1) 왕이 발원한 탑지

 염거화상탑은 탑신에 사천왕 부조상이 새겨진 첫 번째 탑으로 능지탑 등의 경주 왕릉 십이지상과 자세나 조각 솜씨 등이 유사해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탑지에서도 앙이 발원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회창 4년 간지가 갑자년이던 해(884년, 문성왕 6) 9월 26일에 돌아간 염거화상의 탑으로, 석가모니불이 열반에 든 지 1804년이 지나서인데, 이 나라 경응대왕(문성왕) 때이다.]

고대 금석문 서식 방식에서는 왕실과 관련된 글자가 나왔을 때 왕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행을 바꿔 기준이 되는 머리글자와 평행하게 하거나 한두 자 올려 쓰기도 하고, 한 자에서 세 자 정도를 비워 두는(간자 또는 공격) 방식으로 표기한다. 문성왕이 855년에 발원하고 깁입지가 찬한 경주 창림사 '국왕경응조 무구정탑원기'에서도 볼 수 있으며,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조상기'에서도 임금의 이름인 정 자 앞뒤로 한 자씩 간격을 두었다. 이에 반해 염거화상탑지에서는 마지막 행에 왕 이름인 경응대왕이 나오는데도 간자를 두지 않았고, 행을 올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행보다 내려서 글자 사이를 좁혀 다른 행과 똑같이 아홉 글자를 새겼다. 염거화상탑지에서 이러한 예외적인 고대 금석문 서식을 보이는 것은 문성왕이 직접 발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2) 탑과 탑지 제작 연대

탑지 면문에서 스님이 입적한 회창 4년(844)과 함께 불멸 연대가 표기되어 있다. 중국에서 불멸 기년은 법림이 확정한 주서이기에 맞추어 기원전 949년 설인 북방설을 따랐다. 신라의 불멸 기년도 북방설을 따랐는데, 우리나라에서 부처가 입멸한 해를 기원전 949년으로 본 기록으로는 장흥 보림사와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조상기가 있다. 보림사 철불을 조성할 당시 주석한 체징스님은 염거화상의 직계 제자이므로 스승의 장례를 주관하고 탑과 탑지를 만들 때 어떤 식으로든 관여했을 것이므로 염거화상탑지의 불멸 기년도 기원전 949년 설을 따랐을 것이다. 탑지에서 "탑은 석가모니불이 열반에 든 지 1904년이 지나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풀이했으므로, 문성왕 17년인 855년에 이 탑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청동기인의 염원, 평창 돌널무덤 출토 청동검

오래된 무덤을 발굴하면 십중팔구 토기를 피롯한 여러 유물이 함께 출토된다. 그 유물들은 무덤 주인이 살아있을 때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단서이다. 또한 어떤 물건이 묻혔는지에 따라 묻힌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당시 쉽게 구할 수 없던 물건을 함께 묻었다면 그 무덤 주인은 좀 더 특별한 사람일 것으로 추정한다.

돌널무덤

 2016년 강원도 평창군 하리 유적에서 청동기 시대 무덤 14기가 발굴 조사되었다. 모두 청동기시대의 돌널무덤이며, 이 무덤들 가운데 9기에서 매장주체부라고 하는 시신이 묻힌 곳이 확인되었다. 특히 2호 무덤은 조사된 무덤들 중 가장 크고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이 무덤을 조사하자 무덤 주인의 유골과 비파형동검이 함께 출토되었다. 청동기 시대에 묻힌 사람 뼈와 물건이 함께 확인된 경우는 처음이다.

 비파형동검은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비파와 형태가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중국 라오닝 지방에서 주로 출토되어 요령식 동검이라고도 불린다. 한반도에서도 상당수 출도되었는데 출처를 알 수 없는 것까지 포함하면 60여 점에 이른다. 비파형동검은 검신 중간 부분에 튀어나온 돌기가 특징적이며, 이 돌기가 점차 사라지는 형태로 변화하고 돌기 아랫부분 검신도 조금씩 얇아진다. 평창군 하리 유적에서 발견된 청동검은 전형적인 비파형동검보다 돌기도 뚜렷하게 튀어나오지 않았으며, 돌기 아랫부분 검신도 꽤 얇은 형태로 비교적 늦은 시기의 것이다. 

 청동은 녹는점이 900℃ 이하인 합금이다. 이보다 높은 온도인 1093℃에 녹는 구리 80~90%에 녹는점이 327℃인 주석 10~20%와 232℃에 녹는 납을 빐한 아연 등 광물 10% 미만을 섞어 만든다. 배합 비율에 따라 석청동, 연청동, 황동 등으로 구분한다. 이렇듯 청동은 높은 기술력과 많은 노력에 의해서 탄생하는 귀한 물질이다.

청동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불인 청동검은 고도의 기술력으로 만든 귀중한 물건이다. 이런 물건을 함께 묻었다는 것은 묻힌 사람의 지위나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나타낸다. 한편으로는 무덤 주인 주변 사람들의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시 최고급 물건을 죽은 사람을 위해 무덤에 함께 넣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정말 아끼고 소중히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3. 혁신적인 토기 제작 기술, 춘천 중도 유적 출토 중도식 토기

 중도식 토기는 춘천 중도에서 그 실체가 명확하게 확인되어 붙인 이름이다. 중도식 토기를 맨 처음 확인한 것은 1964년 풍납토성을 조사하면서이다. 당시에는 '풍납리식 무문 토기'라고 불렸으나 그 뒤 연구가 진전되지 않아 사장된 용어이다. 그러던 중 1980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중도 유적을 조사하고 경질 무문 토기와 집터를 확인하면서 '중도식 토기'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중도 유적을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춘천 의암댐을 건설하면서부터이다. 의암댐 건설로 중도가 있는 북한강의 수위에 잦은 변화가 생겼고, 수위가 낮을때 강물에 의해 깎인 부분에서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다. 이를 계기로 1980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
 총 네 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고, 중도식 토기를 비롯해 집터 내부에 강돌을 깔고 그 위에 진흙을 덮은 '중도식 화덕'이 확인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사로 그동안 실체가 명확하지 않았던 중도 문화의 실체가 확인되었다.

중도토기

 중도식 토기는 한반도 중부 지역 원삼국시대를 대표하는 토기이다. 주로 단단한 민무늬 토기를 말하지만, 연구자에 따라 두드림무늬 토기를 포함한다. 원삼국시대 남부 지역에서는 '와질 토기'라고 하는 삼국시대 토기의 원형이 되는 토기가 확인되었지만, 중도식 토기가 발견되기 전까지 중부 지역에서는 이러한 토기가 확인되지 않았다. 결국 중도 유적이 발굴 조사되고, 중도식 토기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중부 지역 원삼국시대의 문화상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중도식 토기는 청동기시대 민무늬 토기의 전통이 지속된 것이다. 그에 더해 한반도 서북이나 동북 지방의 퇴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기형들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청동기시대보다 더 단단하게 만들어 음식을 조리하거나 저장하는 데 훨씬 유용했다. 두드림무늬 토기는 한반도 중서부에 있던 낙랑의 영향으로 등장한 것이다.

 중도식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던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급변기를 맞고 있었다. 청동기시대에 사회 조직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아직 고대 국가가 탄생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는 여러 소규모 정치체가 고대 국가로 성장해 나가는 때였다. 비록 중도식 토기를 사용하던 정치체가 고대 국가로 성장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다른 지역의 토기 기술을 받아들인 것은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museum.go.kr)

 

국립중앙박물관

 

www.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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